Table Talk.
Pick
#
52
2024.04.25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오늘의 키워드
#사회참여
#비영리/활동가
오늘의 질문
행사 안내
오늘의 키워드
#사회참여
#비영리/활동가
오늘의 질문
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의 공간은 무엇인가요?
Table Talk #52호 섬네일.

👀 에디터 노트

당사자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참여하는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방법이기도 하고요. 단체 설립, 활동 기획, 자금 확보, 자원 연결 등의 업무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딱히 조언을 구할 곳도 없죠. 고단하고, 심란한 일의 연속입니다.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단체를 만들고,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 행사를 진행한 박지니님에게 그간의 과정과 후일담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비슷한 성격의 모임/단체 설계를 고민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정보와 지식이 부족하여 실천에 옮기지 못하거나, 시행착오를 겪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사적 모임에서 벗어나 공적 발화를 할 수 있을까요? 공적 모임이지만 딱딱하거나 촌스럽지 않게 활동할 방법은 없을까요? 어렵지 않게 사회 활동과 행사를 설계할 방법은 없을까요? 박지니 님의 경험을 통해 실마리를 얻고, 계기를 마련하면 좋겠어요.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은 덤으로 얻어 가시고요!

👉 긴 글은 PDF로도 받아볼 수 있어요.


Pick 코너 로고. 사회혁신 사례와 모델을 소개하는 Table Talk - Pick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우연히 시작해 2회까지 성료한 섭식장애 인식주간 뒷이야기

저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친구들과 함께 이제 2년째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진행했지만, 처음부터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을 위한 행사를 기획하라는 말을 들었다면 ‘책을 내고 북토크도 거의 한 적 없는 내가…?’ 하고 손사래를 쳤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히도 이 모든 일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고, 저는 눈앞에 닥치는 일들을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마치 헨젤과 그레텔이 땅에 흘린 과자 조각에 유인됐듯이 말이에요.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 포스터. 좌측 포스터에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구가, 우측 포스터에는 "섭식장애 병리는 왜 고정돼 있지 않고 변덕스럽게 변화하는가?"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2024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 포스터 ⓒ잠수함토끼콜렉티브

2021년 11월 당시, 저는 어느 멘탈헬스 디지털 치료제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그 과정을 경험해 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만으로, 환멸을 느낄 채비 후 합류한 일이었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정은 극악했습니다. 내가 바로 그 ‘환자'인데, 환자로선 어이없을 정도의 논리를 붙이고선 만족하는구나, 환자의 진정한 회복이나 인격에는 관심이 없구나! 깨달았지요.

그 무렵 우연히 본 대한비만학회의 한 뉴스 기사가 제 화를 돋웠습니다. 비만/다이어트 시장은 성형과 함께 돈이 몰리는 의료시장 중 하나지요. 저는 비만학회가 이렇게 기세등등 움직이는데 아직 섭식장애학회는 설립조차 되지 않았다는 데 화가 났습니다. 학회를 만들려면 국내외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해 온 연구자를 찾아가야 할 터였고, 그래서 저는 다짜고짜 인제대 백병원 김율리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드렸죠. 자,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그렇게 교수님을 뵌 자리에서 슬쩍 얘기로만 나왔던 것을 제가 밀어붙임으로써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누구를 위한 행사인가?

교수님이 섭식장애 인식주간 얘기를 꺼내신 건, 그 같은 대중적 행사 없이는 섭식장애학회를 설립하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다른 뉴스들에 묻혀 곧 잊히고 말 소식으로 그치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마침 영국, 미국, 캐나다를 비롯해 많은 나라들이 매년 2월 말에서 3월 초쯤에 일명 ‘EDAW(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를 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이듬해 2월에 한국의 첫 섭식장애 인식주간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이었어요.

교수님이 연구소 이름으로 지원해 주실 수 있는 자금은 한정돼 있었어요. 그래서 달리 방도가 없다면 병원 강당을 빌려 장소로 활용하고 자원봉사로 참여할 수 있는 분들만 패널로 초청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죠. 인식 ‘주간’이지만 꼭 7일 내내 뭔가를 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요.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7일을 꽉 채운 세션을 구상하고 있던 저는 절대 그렇게 행사를 끝내고 싶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소외된 채 암담한 시간을 오래 견뎠을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을 생경한 병원 강당으로 초대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이번에도 ‘환자’로서 의학적 권위의 가르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위계적 세팅을 만들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어느 정도 세션들의 얼개를 머릿속에 그린 상태로, 제가 어떻게든 기업 후원을 받아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교수님과 헤어졌습니다.

🙌 기존의 명명 밑에서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걸 하기

사실 ‘섭식장애 인식주간’이라는 행사명도 우리로서는 썩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이 행사를 8, 90년대부터 열어 온 영어권 국가들에선 섭식장애도 ‘병’이다, 그것도 ‘심각한’ 질환이다,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정신질환이니 관심을 가져 달라는 메시지를 일반 대중에 발신하는 데 주력해 왔습니다. 김율리 교수님도 언급하셨듯, 이를테면 섭식장애를 상징하는 보라색 리본을 만들어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후원을 독려하는 이벤트를 하는 식이었죠.

하지만, 보세요. 그건 정말이지 발 담그고 싶지 않은 캠페인이 아닐까요? 우리는 부디 우리를 불쌍히 봐주십사 간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의 환자 경험을 <언다잉>이라는 탁월한 에세이로 풀어낸 작가 앤 보이어(Anne Boyer)는 ‘핑크리본’과 ‘핑크워싱’이 가로막는 진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손택의 말마따나 여자들이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유방암으로 인한 죽음에 있어 여자들이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지금 같은 ‘인식’의 시대, 돈벌이가 되는 핑크 리본 포장이 ‘치유’를 대체한 시대에 우리는 공공선을 위해 우리의 삶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삶의 이야기는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과거에 로드는 유방암을 둘러싼 침묵에 맞서 글을 썼지만 이제 그 침묵의 자리는 유방암을 둘러싼 언어가 내는 유례없이 끈질긴 소음이 차지하고 있다. 현시대에 주어진 과제는 침묵을 뚫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툭하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묵살해 버리는 소음에 맞서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선뜻 자기 자신과 병을 연관 짓지 않으려 했던 손택과 카슨의 머뭇거림은 이제 늘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로, 병을 앓는 여자들을 위해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로 대체되었다.

(중략)

유방암에 걸린 이들 가운데 핑크 워시된 인식 지평에 주기적으로 발을 들일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다름 아닌 유방암 생존자다. 승자들이 향하는 곳에는 서사적 전리품이 뒤따른다. 유방암 투병기라면 응당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를 통해 살아남은 ‘생존기’여야 한다. 즉 자가 진단과 유방 방사선 촬영을 제대로 이행한 원자화된 개인, 시킨 대로 한 덕분에 치료된 질병, 5킬로미터 마라톤, 유기농 녹색 채소 스무디, 긍정적인 사고 등으로 구성된 서사여야 한다. 엘런 레오폴드가 유방암에 관한 개인사를 담은 <더 어두운 리본>에서 지적하듯이 1990년대에 부상한 신자유주의는 유방암에 관한 서사적 관습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외부 세계가 하나의 기정사실로, 사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배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역시 섭식장애의 좋은 온상이 되는 ‘외부 세계’를 ‘기정사실’로 놓고 우리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들 - 90퍼센트 이상이 여성인 - 의 경험이 사적이고도 사적인 극복기나 감상적 스토리로 전락시킬 의향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 세계가 섭식장애의 온상 노릇을 하고 있는지, 그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을 뿐이죠. 그렇다면 7일 간의 세션 기획은 일도 아니게 됩니다. 우리에겐 파헤칠 사안들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섭식장애 인식주간 행사에서 마이크를 들고 발언하는 여성 참가자. 양 옆에 두 명의 여성이 그녀의 이야기를 집중해 듣고 있다.
<2023 섭식장애 인식주간> 첫 번째 세션 모습. ‘섭식장애 당사자 -내러티브 탐구’를 주제로 섭식장애를 경험한 다섯 명이 모여 이야기했다.ⓒ잠수함토끼콜렉티브

🔠 플랜 B, 플랜 C, 플랜 D, 플랜 E…

총 7개의 세션을 기획하고, 처음 생각했던 강연자나 패널에게 섭외 요청 메일을 보내고, 거절당하거나 다른 이유로 애초의 기획을 접고, 또 다른 잠재적 강연자분께 연락하는 식으로, 그러나 전혀 실망감이나 조급함 없이 일을 진행하면서, 저는 오히려 그 덕에 국내 섭식장애 및 치료에 관한 랜드스케이프를 제 머릿속에 새로 그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분들로 패널을 꾸리자는 애초의 생각이 너무 편협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든가, 이 분은 당연히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식이었지요.

그렇게 플랜 A가 활력을 잃으면 곧바로 플랜 B를 시도하고, 다시 플랜 C, 플랜 D를 내놓는 식으로 저는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그 과정이 전혀 불안하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았던 건, 그 핑계로 제가 만나보고 싶었던 분들께 연락을 드리고 실제로 대화를 나눌 기회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섭식장애에 관한 한 개인적으로는 20년 넘게 고민하고 공부해 왔던 터라, 하고 싶은 것들 혹은 차선책 기획안은 화수분처럼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병을 오래 앓은 사람에게 그 병을 주제로 얘기를 해 보라고 하면 다들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향후 3년 간 개최할 섭식장애 인식주간 세션들을 기획해 보라’는 프롬프트를 받는다면, 챗GPT처럼 술술 제안을 내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곤 합니다.

하지만 강연자를 모으는 일로만 행사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저는 섭식장애 인식주간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분들이 섭식장애에 대한 편견과 수치심에 방해받지 않고, 아주 가뿐히 기쁘게 행사에 참여할 수 있길 바랐습니다. 그러려면 행사 장소는 아늑하고 사적인 문화공간이면 좋을 것이었고, 서울 곳곳의 독립서점들만 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연락드린 건 당시 연희동 주택가 골목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밤의서점’의 일명 ‘폭풍의 점장’, 남지영 점장님이었죠. 이미 4, 5년 전 출판사 편집자와 서점 운영자로서 만나 인연을 맺은 분이었던 터라, 저는 트위터 DM으로 ‘독립서점 대관하는 법’을 여쭈었습니다.

그랬는데 점장님이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혼자 하느냐면서, 도와주겠다고 발 벗고 나서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유일하게 가능한 시간대인 아침 7시에 Zoom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저는 혼자 출근한 회사 사무실에서, 점장님은 집 거실에서 “눈곱도 못 떼고서” 말이지요.

점장님과 주로 논의한 내용은, 어떻게 기업 협찬을 받아내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행사 기획안을 정리한 즉시 저희가 선정한 몇몇 브랜드에 콜드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농담 삼아 저는 내가 마치 대출 권유하는 예의 저 ‘김미영 팀장’이 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기업들에 무작정 보낸 제안은 어떤 반응도 끌어내지 못했지만, 그러다 막바지에 우연히 영국 브랜드 러쉬(Lush)의 한국 본사에서 진행해 온 ‘채러티 팟’이라는 자선 프로그램을 알게 됐고, 2023년 상반기 후원 대상자로 덜컥 선정까지 되었습니다. 덕분에 첫 회 섭식장애 인식주간은 돈 걱정 없이 진행할 수 있었죠.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활동가님'이라니, 저를 부르신 거겠지요?
No items found.
(재)행복나눔재단 SIT(Social Innovators Table)팀
서울시 용산구 장문로 60 (동빙고동) 02-333-3963
수신거부 Unsubscribe
URL 복사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