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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023.03.09
누구나 돌봄을 주고 받으며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가족 돌봄 청년 활동가 겸 예술인 김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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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의 공간은 무엇인가요?

선뜻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유년 시절의 결핍, 가정 폭력의 흔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예술인이자 커뮤니티 운영자이다. 영케어러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가족 돌봄 청년의 문제를 알리고 관련 제도 개선을 위한 활동도 전개 중이다.


Q. 예술인, 영 케어러* 활동가, 또래상담가 등 다양한 활동 직함을 보유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린다.

A. 답이 좀 길어질 것 같다. 직업적으로 1인가구 및 청년 대상 자기발견·대화 커뮤니티 <속마음살롱> 진행자, 청년예술인, 명함 하나 없는 무소속 프리랜서로 주로 소개를 하는데, 이외에 비진학청년, 탈가정청년, 가정폭력생존자, 암생존자, 영케어러 등 많은 정체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늘은 가족 돌봄 청년으로서 인터뷰를 요청받은지라, ‘중3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신 이후 보호자가 된 김율입니다’로 소개드리겠다.

*영 케어러(가족 돌봄 청년) : 만성적인 질병이나 장애를 지닌 가족을 돌보는 청(소)년

Q. 영 케어러(가족 돌봄 청년)로써 경험을 간략히 공유한다면.

A. 이혼가정에서 자라다 아버지가 쓰러지신 중3때부터 아버지를 돌보게 되었다. 뇌출혈 이후 아버지는 경제력을 상실하였고, 요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 고향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모시고, 나는 고모 댁에 살면서 학교를 다녔다. 주말이나 방학 때는 요양병원에 찾아가 약을 챙겨드리고 산책을 시켜드렸다. 당시는 보호자로서 정체성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상태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불안하고 우울할 뿐이었다. 사실상 일상에서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탓에 더 힘들었던 것도 같다.

아버지는 병원 생활 1여년 만에 어느 정도 회복이 되셔서 퇴원을 했다. 집에서 단둘이 살게 됐는데 그 즈음부터 아버지의 폭력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전에 미처 발견되지 않았던 정신질환이 뇌출혈을 계기로 급격히 악화된 탓이었지만, 이때는 알지 못했다. 이때부터 집은 나에게 학대의 공간이 되었다. 아버지의 식사나 약을 챙겨드리는 등 돌봐드리기도 했지만, 보호자라기보다 가정폭력피해자로 스스로를 인식했던 것 같다.


아버지 또한 스스로가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채 그저 되는대로 굴러갈 뿐이었다. 곧 가스, 전기가 끊기고 급식비도 못낼 정도로 형편이 매우 어려워졌다. 서울대라는 학벌과 괜찮은 경력을 가졌던 아버지는 스스로를 도움이 필요한 약자로 인정할 수 없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가 기초생활수급권마저도 거부하여 경제적, 물리적, 정서적 학대에 노출된 나는 진로나 진학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유일한 목표는 하루 빨리 폭력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돈도 없이 무작정 상경했다. 돌봄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가해자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탈출이었다. 시간이 흘러 몇 년 후 아버지에게 찾아가 사과를 요구했지만 아버지는 거부하셨고, 그 때 나는 아버지와의 절연을 결심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년 후, 병원 연락을 통해서였다. 뇌경색으로 다시 쓰러진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앙상해진 모습으로 누워 와해된 언어를 쏟아내셨다. 아버지가 살던 집에 가보니 집안 모습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냉장고, 세탁기는 물론 변변한 가전이나 생활용품도 없이 쓰레기만 집안 가득 차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아버지가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환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랜 기간 조현병이라는 정신질환이 방치되어 병원에서도 감당이 어려운 수준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과 친척 어른들에 대한 분노가 혼재했다. 가정폭력 가해자였지만 그래도 약자가 된 아버지를 외면할 수 없었던 나는, 아버지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기로 했다.

[젊은 시절 나의 아버지]

폐쇄병동을 거쳐 요양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겼다. 아버지가 계실 만한 곳을 찾다보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서울에서 생계 활동 등 일상을 보내고, 보호자의 역할이 필요할 때는 아버지가 계신 창원요양병원에 다녀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로 문자나 통화로 요양병원 의료진과 소통하고, 아버지의 상태를 체크한다.

Q. 영 케어러(가족 돌봄 청년)이 마주하는 상황과 어려움은 무엇인가?

A. 청년기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특히 청소년기 돌봄 상황에 처한 경우 어려움이 큰 것 같다. 아직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화하여 판단하기 어려운 나이이고, 어디서 어떻게 필요한 도움을 구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선 생계 뿐 아니라 학업과 미래 준비에 적신호가 켜진다. 돌봄이 필요해진 보호자가 경제력을 상실하여 학비나 용돈은커녕 생활비마저 마련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 보호자 역할을 하느라 공부와 경험을 할 시간과 기회도 잃게 된다. 정서적 어려움도 큰 부분이다. 대부분의 질병, 질환은 악화될 뿐 좋아지기 어렵고, 끝이 보이지 않는 힘듦 속에 희망이 사라진다. 조언과 도움을 줄 어른과 세상의 부재 속에 고립이 지속된다.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하면 주로 신체적, 물리적 어려움을 먼저 떠올리는데, 사실 이 정서적 고립이 정말 힘든 부분이다. 치매나 여타 정신질환을 가진 가족을 돌보는 경우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이 더욱 가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봄 청년이 갖는 어려움의 근본적 원인은 그들의 가족이나 돌봄 대상이 필요한 돌봄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있다는 점이다. 즉 우리 사회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돌봄 책임과 의무를 100% 개인에게 지운 채 독박 돌봄과 희생을 방치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는 얘기다. 단순히 생계나 교육 등 결과로 드러난 어려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돌봄 수요자가 좋은 돌봄을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김율님과 아버지가 놀이터에서 턱에 손을 꽃받침처럼 대고 서로 얼굴을 댄 채로 사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버지의 보호자로서 아버지가 원하는 돌봄과 일상을 함께 할 수 있길 바란다]

Q. 영 케어러(가족 돌봄 청년) 문제를 포함하여 '돌봄'이 화두다.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들의 돌봄은 어떻게 다른가?

A. 취약성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조건은 빈곤이다.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시간을 쓰게 된다. 돌봄이 필요한 상황에 돈이 없을 경우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돌봄에 쓰게 된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 시간은 돈이다. 그 시간만큼 생계나 생산 활동을 할 수 없게 되고 빈곤은 가속화된다.

영 케어러는 여기에 한부모가정, 조손가정 등 관계적 취약성이 중첩되어 있다. 달리 가족을 돌볼 사람이 없어, 공부와 진로 준비 등 인생의 토대를 만들어야 할 시기에 시간과 에너지를 돌봄에 소진하게 된다. 돌봄이 장기화되어 성인이행기의 시기에 내내 가족을 돌보다 그 대상자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나이만 먹은 채 학력도, 커리어도 없이 결혼도 못한 채 혼자 남을 뿐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보상이 불가능하다. 돌봄을 통해 내적으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기여하고 있다는 자긍심과 기쁨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돌봄에 쓴 시간은 회사에서 일한 것과 같이 사회적으로 그 생산성이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취약계층은 또한 사회적 관계나 정보력 부족으로 인해 필요한 지원 제도에 대한 접근 자체가 어렵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고 어떤 돌봄 지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본인도 잘 모르고 주위에 나서서 알려주는 이도 없다. 현재의 지원 체계는 필요한 사람이 먼저 나서 도움을 구해야 하는 구조라 있는 지원을 받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사례를 발굴하고 필요한 도움을 연결하는 데에 학교나 지자체 등의 역할이 중요한 지점이다.

Q. 유효했던 도움, 그리고 기대했지만 받지 못한 도움이 있다면 무엇인가?

A.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큰 도움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졸업 전까지 매월 20만 원씩 주어졌던 기업 장학금이었던 것 같다. 그게  없었더라면 학교 밖 청소년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용돈이 전혀 없었는데 덕분에 필수용품도 사고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다.

햇살 가득한 날 학교 소풍에서 교복을 입고 빨간 꽃을 귀 옆에 꽂은 상태로 턱 아래 꽃받침 포즈로 사진을 찍는 김율 님의 학창시절 모습
[나의 학창시절]

절박했지만 받지 못한 도움으로는 주변 어른이나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받지 못한 것이 떠오른다. 사실 아버지가 아프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폭력이 더 힘들었다. 엄마가 없던 나는 할머니께 아빠가 나를 때린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어쩌겠니, 네가 참고 살아야지’라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나의 할머니이기 전에 아빠의 엄마구나, 나를 보호해 줄 사람은 세상에 없구나란 생각에 절망했었다.

이후 아빠의 폭력을 피해 도망다니는 나를 발견한 이웃이 고맙게도 신고를 해준 일이 있었다. 그런데 출동한 경찰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저 ‘다음에 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형식적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처음으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한 일이었는데, 세상은 믿을만한 곳이 아니구나란 생각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움을 구했던 당시 적절한 개입과 조치가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좀 더 빨리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나도 교육 외 필요한 지원을 받으며 좀 더 나은 시간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누구나 돌봄을 주고 받으며 '나'로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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