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ble Talk.
People
#
42
2023.11.30
시각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읽을 수 있도록
이보인 팀장(행복나눔재단 R&D lab), 김정호 이사(엑스비전테크놀로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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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질문
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의 공간은 무엇인가요?
Table Talk - People 41호 섬네일. 어두운 자켓과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발표를 진행 중인 행복나눔재단 이보인 팀장과 엑스비전테크놀로지 김정호 이사의 모습.

“시각장애 학생의 학습 의지와 욕구는 얼마나 높은가?”라는 질문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시각장애 학생의 학습권을 외면하는 차별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잘 들어오셨습니다. 이번 뉴스레터는 시각장애 학생의 학습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좀 전의 질문에 대해 안승준 한빛맹학교 교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장애라는 한 가지 요인이 사람의 의지와 욕구와 적성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시각장애 학생에게 적절한 교육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라고 자문해야 할 때입니다.”


초록색 니트를 입고 시각장애인의 교육 환경에 대해 말하는 유튜버 김한솔. 책이 없을 때는 쪽지 시험 0점, 책이 있을 때는 100점을 받았다고 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김한솔 유튜버]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진다.” 헌법 제31조 1항입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으로서 겪는 일상의 단면을 소개하는 김한솔 유튜버는 말했습니다. “공부하려고 해도 점자로 제작된 책이 아예 없어요. 수업이랑 친구들 설명만 듣고 시험을 쳐야 하는 거예요. 책이 없어서 쪽지시험 0점 받은 적도 있어요. 책이 있을 땐 100점 맞았고요.” 시각장애 학생이 점자로 된 교재를 받아보려면 최소 2~3달, 길게는 1년, 평균 5개월이 소요됩니다. 주문 후 하루면 집앞까지 도착하는 비장애인용 교재의 보급 상황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시각장애인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빛을 지각하지 못하는 '전맹', 일상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는 '심한 저시력', 그리고 ‘심하지 않은 저시력’으로요. 어떤 학생에겐 점자가 유용하고 어떤 학생에겐 확대 교재나 음성 자료가 유용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교재나 교구, 심지어 교과서마저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한 시각장애 학생은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공무원이 되길 희망한다고 답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시각장애인이 직업을 가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서라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직업 선택에 앞서 학습 과정에서부터 교육이 무의미하다는 세뇌의 과정을 겪는 것이죠.. 시각 손상이라는 장애를 가졌을 뿐인데 교육의 기회마저 박탈당하는 시각장애인의 학습권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학생과 학습의 간극을 줄이는 행복나눔재단의 프로젝트

이보인 팀장의 발표 현장 사진. 이보인 팀장이 무대에 서서 설명 중이고, 뒷편 큰 스크린에는 발표자료가 띄워져 있다.
[사진=컨퍼런스에서 발표 중인 이보인 R&D lab 팀장]

행복나눔재단은 지난 11월 16일 <시각장애 학생의 학습과 성장>이라는 주제로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시각장애 학습과 관련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이보인 행복나눔재단 R&D lab 팀장, IT기술을 기반으로 대체자료를 제작하는 김정호 엑스비전테크놀로지 이사를 비롯, 시각장애 학생의 차별없는 배움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박진석 이화여자대학교 특수교육연구소 연구원이 참석해 시각장애인의 학습을 어렵게 하는 요인부터 상황 개선에 필요한 접근방법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먼저 이보인 행복나눔재단 R&D lab 팀장은 시각장애 학생의 학습권 향상을 위한 방법론과 목표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행복나눔재단이 설정한 목표는 시각장애 학생과 학습자원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고, 이를 위해 취한 방법은 밀착관찰이었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점형 익히기 - 촉각으로 이해하기 - 복잡한 문법(74개 규정) - 풀어쓰기, 읽기 순으로 진행되는 점자 학습 과정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배우는 과정]

첫 미션은 점자를 쉽게 배우게 하기였습니다. 비장애인이 한글을 떼는 것과 달리 점자를 배우는 건 생각보다 매우 어렵습니다. 점형(점자의 모양)을 익히고, 촉각으로 이해하고, 74개나 되는 점자규정(문법)을 외우고, 풀어쓰고 읽기의 4단계를 거쳐 점자를 완전히 익히려면 3년이 넘게 걸립니다. 이 시간을 단축하고 시각장애인이 점자 익히기를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해 행복나눔재단은 배울 기회를 놓친 126명의 시각장애 학생이 점자를 익히는 과정을 1년간 밀착 관찰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문제점을 도출하고 새 교구를 개발했죠. 바로 점형을 익히는 교구 '탭틸로'와 점자 쓰기 학습도구 '버사슬레이트'입니다. 재미있게 점자를 학습할 수 있도록 낱말 카드와 동화책, 반복학습을 위한 앱도 만들었습니다.

점자 실력의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파악하는 도구가 없다는 사실에 착안해, 점자 문해력 평가 지표도 개발했습니다. 어느 영역이 부족한지 알아야 실력이 향상 되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점자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점자 학습 진도가 차이난다는 점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의 점자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제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자교육이 점차 발달해 점자 일일학습지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진도에 따라 공부할 수 있고 학부모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죠.

교사(진도 관리, 멘토링), 탭틸로(점형 익히기), 교구·교재(낱말카드, 동화책, 학습 앱), 평가 지표(영역별 문해력 측정), 부모 교육(교수법, 네트워크 모임)
[점자를 배우기 위한 프로그램]

그렇게 부족한 점을 하나씩 메꿔가며 교구와 교재, 선생님을 지원한 결과는 어땠을까요? 당초 학습목표는 일반 초등학생이  책 읽는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었는데 12개월의 교육 과정을 마쳤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의 80% 수준으로 실력이 향상되었습니다.


또 점역 문제집이 전국 어디에 있는지, 소장하고 있는 기관에서도 검색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역 문제집 정보를 모아 ‘에듀모아’라는 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에듀모아’를 사용하면 학생들은 점자 자료가 전국 어느 기관에 있는지 단 5분만에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행복나눔재단이 발견한 두 번째 문제영역은 점자로 공부하는 게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국내에서 문제지를 점역 맡기는 등 의지 있게 점자로 공부하는 학생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시나요? 단 10명입니다. 재단은 그중 9명을 섭외해 4년간 밀착 관찰했습니다. 그랬더니 사소하고도 중요한 문제점이 도출되었습니다. 점역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거죠. 문제집이 출판되자마자 점역을 맡겨도 평균 5개월 후, 학기가 끝나서야 문제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점역사 1명이 책 1권을 전부 점역해야 책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왼쪽은 기존 점역 방식을 나타내는 표. 오른쪽은 여러명이 단원별로 점역을 맡아 학생에게 문제집을 제공하는 기간을 단축했음을 보여주는 표.
[점역 과정의 간소화]

그래서 도출한 해결 방법은 인력을 충원하고, 점역 과정을 쪼개는 것입니다. 1명이 한 단원을 점역하는 게 1개월 소요된다고 봤을 때, 4명이 동시에 점역하면 1개월 만에 4단원짜리 책을 점역할 수 있겠죠. 그 결과, 문제집을 받는 시간이 약 5개월에서 1개월 반으로 3개월 반 감축되었습니다. 점역 과정의 작은 포인트를 캐치하고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흥미롭지 않나요?


이보인 팀장은 이러한 문제를 발견할 때마다 "매번 놀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직 찾지 못한 문제는 많다. 밀착관찰하고 간극을 찾고 간극을 메꾸는 실험을 시도한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작은 문제를 발견하고 실험을 반복하며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루미와 여우가 함께 식사하는 방법은?

연단에 서서 점자로 발표문을 읽으며 발표하는 김정호 이사의 현장 사진.
[사진=김정호 엑스비전테크놀로지 이사의 발표 모습]

두 번째 연사로 단상에 오른 김정호 이사가 재직 중인 엑스비전테크놀로지는 시각장애인용 대체 자료, 화면읽기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는 회사입니다.


김정호 이사는 세상에 학습자료가 수도없이 보급된 상황에서 시각장애 학생이 학습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두루미와 여우' 우화에 빗댔습니다. "두루미는 널따란 접시에 담긴 음식을, 여우는 호리병에 담긴 음식을 먹지 못하는데요. 서로의 방식으로 대접하려다가 누구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현실에서도 유명 일타강사의 인터넷 강의 영상이 보급되고 있지만 '이것', '저것'이라 지칭하며 판서를 가리킨다면 시각장애 학생은 소리만으로 영상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시각장애 학생은 점자, 음성자료, 확대자료 등을 이용해 학습합니다. 전맹이라면 점자나 음성자료가 필요하고, 저시력 학생은 독서확대기, 스마트폰을 이용한 확대자료를 사용하겠죠. ‘이렇게 세상에 자료가 많은데 왜 시각장애인은 자료 결핍을 겪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김정호 이사는 대체자료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대체자료 콘텐트는 우리가 읽는 책을 구성하는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책에는 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이미지, 스타일 등이 포함됩니다.

한글, 숫자, 한자, 로마자로 각각 다르게 숫자 5을 표현하는 이미지와, 복잡한 수식 이미지를 나타내는 발표 자료.
[점자 사용에서 텍스트 표현의 어려움]

예컨대, 텍스트를 점자화하는데 ‘5G’ 통신과 ‘5g’을 구분할 수 없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전혀 달라지겠죠. 그림 또한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래프는 어떻게 읽게 할 것이며 어려움이 많습니다. 폰트의 크기나 머리말, 각주 등의 요소를 말하는 스타일도 비장애인에겐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소지만 시각장애인에게는 도통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자료 제작은 여전히 수작업 비중이 높습니다. 마치 체크무늬 옷을 손 뜨개질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김 이사는 수작업 의존으로 인한 대체자료 제작의 세 가지 어려움을 소개했습니다. 첫째, 자료 제작기간 단축이 어렵다. 둘째, 요소별 표현의 제약이 크다. 셋째, 제작 인력이 많이 필요하다.

점자를 입력하면서 동시에 점자를 나타내는 화면을 가지고 있는 점자 디스플레이
AI로 풍경 안에 있는 요소들을 인식하는 이미지 인식 기술
모나크 사의 점자 디스플레이/ AI 이미지 인식 기술]

김 이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디지털 혁신 사례를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 먼저 모나크 사의 패드형 점자 디스플레이가 있습니다. 김정호 이사의 표현에 따르자면 ‘궁극의 점자 디스플레이’입니다. 다른 기기들이 점자만을 표시할 때 이 기기는 점자와 촉각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일반 이미지 파일을 촉각이미지 파일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고 터치 센서도 탑재되어 이미지의 원하는 부분을 터치하면 음성이나 점자로 설명이 제시됩니다.


다음은 AI 이미지 인식 기술의 사례입니다. 현재는 모두 사람이 수작업으로 이미지 설명을 입력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데요. 김정호 이사는 시각 보조가 필요한 사용자에게 스마트폰 카메라로 인식한 이미지 정보를 알려주는 앱 서비스로 국내에서 개발된 '설리번플러스'를 소개했습니다. AI로 이미지와 사람 얼굴을 인식해 묘사하고 텍스트 인식/스캔까지 가능해 유사한 학습 지원 서비스가 개발되면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외에도 일본의 ‘Infty Reader’은 수식을 인식해 점자로 표현하는 성능이 아주 뛰어난 소프트웨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장애친화적인 디지털 기술과 서비스는 대체자료 제작 기간을 단축하고 제작 인력과 비용을 줄이는 등 학습 접근성 향상에 기여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대체 자료가 필요 없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러니까, 여우와 두루미가 같이 쓸 수 있는 그릇이 있다면요? 김정호 이사는 지난 2008년 애플 사의 아이폰이 국내에 상륙했을 때를 회고합니다.

길쭉한 식기에 부리를 넣어 음식을 먹는 두루미와 납작한 식기에 입을 갖다 대고 음식을 먹는 여우의 모습을 귀엽게 표현한 일러스트
[그림=각자 맞는 방식으로 식사하는 두루미와 여우]

“그때 저희 회사에서는 어떤 스마트폰에 설치해도 시각장애인이 음성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이폰이 한국에 상륙하고 보니까 아이폰의 보이스오버 기능을 켜면 시각장애인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아, 지금까지 개발한 건 다 필요가 없게 됐구나. 더 이상 우리의 기술은 필요가 없구나.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기뻤다고 덧붙였습니다. 시각장애인용 핸드폰을 시중에서 찾기 힘들다거나, 전용 핸드폰이 단종되면 어떡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깐요.


“마찬가지로 시각장애 학생이 다른 학생과 같은 교재를 사용해서 공부할 수는 없을까요? 몇 달씩 기다려서 대체자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그런 어려움도 없고 반 친구들과 함께 같은 자료로 공부할 수 있으면 참 좋지 않을까요? 아직 오진 않았지만 2025년 AI 디지털 교과서가 도입되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2025년 도입 예정인 AI 디지털 교과서는 장애 학생을 위한 ‘접근성 기능’을 제공해야만 한다고 개발 가이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순차적으로 모든 과목에 적용될 예정인 이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마치 아이폰의 등장과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자료가 필요 없게 되면, 저희 회사가 하는 일은 쓸모 없게 되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만들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디지털 교과서를 설계할 때 시각장애 학생에게 필요한 기능들을 세세하게 고려해야 하고, 출판사가 아주 강한 의지를 갖고 정부에서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따라 디지털 교과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디지털 교과서 개발자, 편집자들에 대한 관련 교육과 기술 지원도 필요할 것입니다. 시각장애 학생들이 각자에게 맞는 방법으로 공부해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자신만의 꿈을 이루어 갔으면 합니다."

시각의 한계를 넘어, 세상을 읽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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