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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2
넘어진 자리를 전시합니다.
아산나눔재단 이영빈 기업가정신팀장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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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하는 공공의 공간은 무엇인가요?

 

벌써 10월도 일주일 남짓 남았습니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한 해를 돌아보게 되죠. 하고 있는 일의 결과도 정리하게 됩니다. 성과 지표는 표 한가운데 또렷하게 자리를 잡지만, 그 숫자에 닿기까지 몇 번이고 방향을 틀었던 시간은 ‘향후 과제’ 칸에 한두 줄로 접혀 들어가곤 합니다. 돌이켜 보면 가장 많이 배운 순간은 대개 그 접힌 줄 안에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실패를 꺼내 보이는 일에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고, 그 용기는 혼자서 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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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넘어진 경험을 감추지 않고 정성껏 들여다보는 연습을 해 온 한 현장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읽는 내내 실패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는 누가 만드는 것인지,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어른들은 어떤 얼굴로 서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올해를 마무리하는 보고서에 미처 적지 못한 몇 줄이 있다면, 이번에는 그 ‘실패’를 위한 오답노트를 따로 펼쳐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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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한가운데 실패를 전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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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이면 수천 명의 중·고등학생이 한 곳에 모입니다. 아산나눔재단의 청소년 기업가정신 교육 프로그램 '아산 유스프러너'의 데모데이 현장입니다. 한 학기 동안 팀을 이뤄 주변의 문제를 찾고 직접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본 학생들이 그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로, 올해는 약 3천 명의 학생이 650여 개 프로젝트에 도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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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축제 한쪽에는 조금 이상한 전시장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실패 박물관'입니다. 작품 앞에는 그 실패를 겪은 학생이 직접 전시 해설가(도슨트)로 서서, 어디에서 왜 넘어졌는지를 관람객에게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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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정주영 현대 창업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재단이 실패를 모아 박물관을 열었다는 것이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을 실패를 없던 일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 머물지 말고 다음 길을 닦아 나가라는 뜻으로 읽습니다. 다음으로 가려면 먼저 내가 어디서 넘어졌는지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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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아산 유스프러너가 지난 10년간 그려 온 기업가정신 교육의 방향을 짚어 보고, 최근 3년간 축제 안에 '실패의 자리'를 만들어 온 과정을 나누려 합니다. 그 자리에서 학생들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운영하는 저희는 무엇을 배웠고 앞으로 무엇을 바꾸려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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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해봤어?"에서 시작한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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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유스프러너는 2016년부터 전국 800여 개 학교, 약 1만 9천 명의 학생과 만나 왔습니다. 학생들은 일상 속 문제를 스스로 찾고 시드머니로 해결책을 직접 만들어 실제 고객에게 팔아 보며 아이디어를 검증합니다. 책상 앞에서 배우기보다, 직접 해보며 배우는 것(Learning by Doing)이 기업가정신 교육의 핵심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교육 과정의 효과성을 2019년부터 전문 연구진과 함께 다년간 살펴 왔는데, 가장 최근 연세대학교 교육학과 연구팀과 진행한 2024년 연구에서 아산 유스프러너 참여 학생들은 혁신성·진취성·위험감수성 등 8개 핵심 역량 전반에서 미참여 학생보다 더 크게 성장했습니다. 기업가정신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역량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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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프로그램을 담당자와 관리자로서 운영한 지 올해로 7년째입니다. 그사이 교실은 여러 번 흔들렸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코로나가 있었고, 산업혁명에 견줄 만하다는 AI 시대도 맞이했죠. 교육 현장에 영향을 준 변화는 많았지만, 학생들이 배우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았다는 점에서 AI의 영향이 가장 크다고 느낍니다. 요즘 학생들은 몇 분 만에 시장 조사를 마치고 말 몇 마디로 앱 화면과 홍보물을 뽑아냅니다. 누구나 번듯한 결과물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지금, 학생에게 정말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저희의 답은 ‘진짜 문제를 찾는 힘’입니다. 그럴듯한 시제품을 만드는 문턱이 낮아진 만큼, 이제는 만드는 기술보다 풀어낼 기회와 가치가 있는 문제를 찾고 실제 고객의 반응으로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배움이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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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희는 프로그램의 한가운데에 ‘리얼월드 경험’, 곧 교실 밖 실제 세상과 마주하고 부딪혀 보는 경험을 둡니다. 그리고 실제 상대·현장 반응·근거 있는 피봇이라는 세 기준으로 그 경험이 진짜인지를 가늠합니다. 진짜 문제를 찾는다는 것은 몇 번이고 부딪히고, 틀리고, 방향을 바꿀 각오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설계에는 넘어진 순간을 다음 도전으로 잇는 자리가 꼭 함께 있어야 합니다. 길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몇 번은 넘어집니다. 기업가정신 교육이 넘어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넘어진 뒤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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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유스프러너에서 실패가 배움이 되는 구조 | ⓒ아산나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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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만 무대에 오르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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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해보는 교육이다 보니 프로젝트는 거의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데모데이는 오랫동안 성공 사례를 주로 소개하는 자리였습니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배운 순간은 무대 뒤에 남아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다 저희는 기업가정신을 성공적으로 실천해 보는 경험만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며 자기 진로와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해 보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재단 전체가 청년 창업가와 사회혁신가의 자기성찰력과 회복탄력성(resilience), 그리고 실패한 뒤에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환경에 주목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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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가장 큰 배움의 기회이지만, 청소년에게는 유난히 무겁습니다. 성적표와 수행평가는 대부분 결과만을 묻고 실패해도 괜찮은 경험을 해볼 기회는 드물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희는 실패를 꺼내고 돌아보고 나눌 수 있는 자리를 설계하기로 했습니다. 학교라는 안전망 안에서 다양한 실패를 마주하고 또래의 실패담을 들으며 실패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넘어진 뒤 내딛는 다음 걸음을 함께 응원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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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학생 5명이 실패담을 발표하는 ‘천하제일 망함대회’로 시작한 이 시도는 해마다 모습을 바꿔 왔습니다. 실패를 ‘듣는’ 자리에서 ‘보는’ 자리로, 다시 학생이 직접 ‘말하는’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첫해에는 실패 페스티벌에 참여한다는 게 생소하고 부끄러워서인지 사례 수집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어느덧 교육 프로그램 내 문화로 자리 잡아 이제는 학생들이 실패 박물관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는 현장의 반가운 소식을 듣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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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에 따른 ‘실패의 자리’ 변화 | ⓒ아산나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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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실패에 붙인 다른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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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준비하며 학생들과 많은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따로 묻지 않았는데도 학생 대부분이 실패에 저마다의 이름을 붙이고 있었고, 그 이름에는 다시 시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들의 사례 세 가지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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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실패에 붙인 이름들 | ⓒ아산나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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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 현장에서 진짜 문제를 찾다 : 다회용기 포장 앱

‍한 고등학교 3학년 팀은 아파트 단지에서 배달 다회용기를 돌려 쓰는 시스템을 구상했지만 비용과 세척에 막혔습니다. 손님이 직접 그릇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바꿔 가게 10곳을 찾아가 보니 사장님들은 흔쾌히 포장해 준 반면, 진짜 걸림돌은 ‘이런 부탁을 해도 될까’ 망설이는 손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팀은 다회용기 포장이 되는 가게와 알맞은 그릇 크기를 알려주는 앱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학생은 “책상 위에서 해결책부터 만들려고 했던 게 가장 큰 실패”였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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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2. 실패를 보는 관점의 전환 : 폐어망 채묘기

‍버려진 그물로 어린 전복이 자랄 틀(채묘기)을 만들던 한 고등학교 3학년 팀은 발표 이틀 전 밤 3D 프린터 출력을 맡긴 시제품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팀은 다음 날 점심시간에 점토를 사 와 모형을 빚어 무대에 섰지만, 예상한 완성도에는 이를 수 없었고 데모데이 본선에는 아쉽게 떨어졌죠. 그래도 팀장 학생은 이 경험을 “완벽은 완주를 위한 목표”라는 말로 정리했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끝까지 해낸 것,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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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3. AI 시대의 시행착오 : 신호등 인식 앱

‍교통약자를 위해 카메라로 신호등 색을 알려주는 앱을 만든 한 고등학교 2학년 팀은 사진으로는 잘 되던 인공지능 앱이 실제 거리에서는 초록색 나무를 초록불로 읽는 것을 보고 막막해졌습니다. 정확도가 낮아 사용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고요. 그래도 학생들은 이 실패를 버리지 않고 ‘다락방의 추억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다음 프로젝트에서 다시 꺼내 보완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하나씩 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해 있을 수도 있겠다”는 말과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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