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목을 다쳐 목발을 짚어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평소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던 엘리베이터 안내 표지가 그 며칠 동안은 가장 절실한 정보가 됩니다. 휠체어나 유아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죠. 발목이 나으면 금세 잊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절실함이 평생 계속되기도 합니다. 지하철역에서 길 찾기에 어려움을 겪거나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안내 표지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그 절실함을 디자인으로 풀어 온 사람입니다. 브로슈어와 포스터 작업을 전문으로 하던 디자이너가 우연한 계기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관심은 교통약자를 위한 지하철 안내 표지 프로젝트로 이어졌습니다. 10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사회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설명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눈디자인에서 일하고 있는 김소미 실장입니다. 2012년에 졸업하자마자 입사해서 이력서에 한 줄밖에 없는 사람이에요(웃음). 보통 일의 절반은 브로슈어나 포스터, 책을 만들고 다른 절반은 비영리단체와 공공·연구기관 같은 공공 영역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사회 의제에는 어렴풋이 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어요. 2016년 빛소리친구들 창립 10주년 공연을 본 이후에 장애에 대한 감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사실 오래전부터 빛소리친구들의 공연 포스터 작업을 맡아왔거든요. 단원분들은 제게 동정이나 시혜의 시선이 아닌 전문 무용수로서 작업해 주길 바란다고 하셨어요. 공연에 초대받아 가 보니 기물은 전부 휠체어 눈높이에 설치돼 있고, 수어로 얘기하는 분들이 계셔서 객석 조명도 밝게 설정되어 있었어요. 제가 감각하던 세상과 너무 다른 세상을 만난 거죠. 저는 디자이너니까 당연히 ‘예쁜 것’을 좋아했는데,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구나 싶은 순간을 경험했어요. 그 뒤로 조금씩 관심이 쌓였고, 비슷한 시기에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FDSC)’ 활동도 시작하면서 조금 더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죠.
| 활동하고 계신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FDSC)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어떤 일을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2015~2016년쯤 페미니즘 리부트가 있었어요. 당시 저는 5~6년 차 디자이너였고, 그 연차에 자주 오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이렇게 열심히 해서 뭐가 될까 싶은 패배감이 쌓이던 때, 여성 디자이너끼리 시너지를 만들어보자는 동료 신인아 디자이너의 제안에 올라탔죠. 당시 여성 디자이너가 차별이나 폭력을 겪다 업계를 떠나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당장 법적으로 해결하는 큰일은 어려우니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액션부터 해 보자는 문제의식이 그 시작이었어요.

창립 한 달 만에 대학생 대상 커리어 행사를 처음 열어 지속하고 있어요. 초반엔 포트폴리오를 봐주는 행사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여성 디자이너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자리로 바뀌었어요. 미투 운동을 돌아보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행사에도 디자인을 함께하는 방식으로 참여했고요. FDSC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학습하고 있어요. 접근성을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고요. 지금은 회원 240명, 운영진 10명으로 구성된 조직이 됐어요.
| 비영리·공공 프로젝트와 상업 프로젝트는 어떻게 보면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영역에 따라 디자이너에게 요구하는 태도가 다르기도 한가요?
달라요. 영리 쪽은 투입되는 리소스를 최소화하며 완성도 있게 결과물을 내는 게 중요해요. 당연히 역할도 명확해요. 비영리는 자원이 부족하지만 풀고 싶은 큰 미션이 있고, 각자 잘하는 걸 들고 모여서 같이 힘을 내는 느낌이에요. ‘모두의 지하철’ 프로젝트 같은 경우는 처음 조인하게 되었을 때엔 상상이 잘 안 됐어요. 교통약자분들이 뭐 때문에 헷갈리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답이 나오는 일이라, 시안을 만드는 중에 자문을 받으면서 수정을 거듭했고, 지금도 바뀌고 있죠.
저는 다 같이 일부러 길을 잃어 보는 과정 자체를 재미있어해요. 비영리의 프로젝트를 잘하는 이유예요. 시작할 때부터 수정이 많고 길을 헤맨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거든요. 그리고 비영리 프로젝트를 하면서 돈이나 시간만이 보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도 했어요. 기획 단계부터 같이 들어가서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고민하고 해결하는 기쁨 역시 보상이니까요.
|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가진 환상에서 비롯된 질문이기도 한데요. 제품이나 시설물을 볼 때 ‘이렇게 바꾸면 좋을 텐데’ 싶은 순간이 일상에서도 많이 있으세요?
예전에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글자나 비율이 이상하다 정도의 감각이었다면, 요즘은 감각을 느끼는 범위가 조금 넓어졌어요. 예컨대 마트에 갔을 때 “여기에 카트 회수대를 설치해 놓으면 사람들이 부딪히기 쉽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기도 해요. 반면 사회초년생 때는 이른바 ‘못생겼다’고 느껴지는 디자인에 과하게 불편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디자인은 모두 아름다워야 하는데 왜 세상엔 이렇게 못생긴 게 많지?”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감각은 일을 하면서 조금씩 다듬어졌죠. 주어진 상황이나 예산 안에서 최선이다 싶은 결과물을 낼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결과물도 내 미적 기준에 안 맞는다고 함부로 평가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예요.
다만 접근성만큼은 조금 달라요.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가 없고, 신체가 건강한, 젊은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느껴요. 이를테면 60대이신 저희 어머니 같은 경우엔 계단을 내려갈 때 불편해하시죠. 평소엔 문제를 못 느끼다가도 어머니와 같이 다니다 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약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느낄 때가 있어요.

| 10년 전 교통약자 환승 지도 논의에 계셨던 분이 이번엔 안내 표지 디자인을 맡으셨어요. 그 10년은 어떻게 이어졌나요?
2017년쯤 사단법인 무의와 지하철 환승 안내 지도를 만든 게 인연의 시작이었어요. 당시 무의는 지하철역에 교통약자를 위한 안내표지를 설치하고 싶었지만, 민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시민 리서치단과 함께 교통약자 환승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모바일 지도부터 만든 거였죠. 저는 그 뒤로 무의가 지도를 계속 업데이트하는 걸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안내 표지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무의는 계속 협력의 문을 두드렸고, 현대로템의 사회공헌 기금을 확보하면서 서울시·서울교통공사에 비로소 ‘모두의 지하철’ 프로젝트를 제안할 수 있게 됐어요. 서울시와 서울교통공사에서도 마침 해 보자고 의견이 모였고, 민관 협력체가 꾸려진 뒤 수행 업체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때 “아, 진짜 하는구나” 싶었어요. 이번에는 10년 전과 다르게 리서치 단계에서부터 디자이너로서 참여해야겠다 생각하기도 했죠.

작년 4월쯤 연구를 시작해서 8월에 첫 시안이 나왔는데, 시안을 만들 때마다 휠체어 이용자를 모시고 “이 사인을 보고 어디로 가시겠어요?”, “방금 그 표지로 6호선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라고 물어보는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여러 번 거쳤어요.
근데 그렇게 실증까지 마친 뒤에 예상 밖의 순간을 마주했어요. 바로 유아차 이용자예요. 유아차 이용자는 평소에는 비(非)교통약자의 정체성이 강한데, 유아차가 있는 순간 갑자기 교통약자성을 가지게 되잖아요. 그래서인지 “한두 계단이면 갈 수 있겠지” 싶은 마음으로 계단 앞으로 갔다가 당황하시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처음 만들었던 표지는 처음부터 엘리베이터를 찾아 나선다는 시나리오로 만들어서, 정작 계단 앞에서 되돌아가는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올해 연구팀에선 유아차 이용자와 휠체어 이용자를 처음부터 함께 연구 대상에 넣고, 비교통약자도 대조군으로 포함해 범위를 넓혀서 봤어요. 책상에서 설계한 시나리오만으로 디자인을 하기엔, 현장에서는 늘 다른 상황을 마주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꼭 리서치 단계부터 참여하려고 해요.

| 유아차 이용자처럼 교통약자가 이동 시간 중 경로 탐색과 재탐색에 42%나 시간을 쓴다는 게 놀라웠어요. 서울역 GTX-A 대합실처럼 안내가 없던 곳에서는 무엇을 가장 먼저 보셨나요?
안내가 정확하지 않아 헛걸음하는 시간, 안내를 신뢰하지 못해 확신 없이 이동하는 시간이 큰 거죠. 연구엔 엘리베이터 대기 시간을 포함하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라서 저도 놀랐어요. 가장 극단적인 곳이 서울역이었어요. GTX가 생기면서 1·4호선을 잇던 환승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이 통째로 바뀌었는데, 안내판은 여전히 예전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거든요. 비교통약자는 그냥 4호선 방향 표시만 따라 걸으면 되지만, 교통약자는 GTX 대합실을 가로질러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동선이에요. 근데 안내 표지는 그렇게 갈 것처럼 안 생겼어요(웃음).
그래서 이런 백지 같은 공간에서는 당사자분들이 실제로 지나간 궤적을 기억해 저희가 직접 그 길을 걸으며 표지를 붙일 자리부터 찾았어요. 연구팀에 따르면 길 찾기엔 반드시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①결정 지점, 그 선택이 맞았다고 확인해 주는 ②재확인 지점, 곧 갈림길이 나온다고 미리 알려 주는 ③미리 보기 안내, 이렇게 세 종류가 필요하다고 해요. 서울역에서는 교통약자가 GTX 대합실로 들어가는 순간이 바로 그 결정 지점이라 화살표 위치와 각도를 계속 고민했어요. 그 과정에서 역무원분들이 위치에 대한 의견을 주시기도 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