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공연을 보더라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화면 속 인물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무대 위 배우가 어디로 걸어가는지 그 장면을 놓치는 순간 콘텐츠가 건네는 의미도 함께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이번 호에는 그 순간을 포착하고 전달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24년 동안 한 사람이 만들어 온 것은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에 닿을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 위에서 그는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 세계를 만드는 사람으로, 서로 다른 감각 사이에 길을 내며 걸어왔습니다. 객석 앞 작은 책상에서 시작된 그 여정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사소해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했던 그 오랜 시간이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왔는지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2024년 3월 21일 저녁, 나는 국립정동극장 무대 뒤에서 배우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는 눈빛을 맞추고 소리 없이 “파이팅”을 외쳤다. 무대감독의 신호가 떨어지자 내가 가장 먼저 무대로 나갔다. 검은 옷을 입고 태블릿과 마이크를 든 채 계단을 내려가 객석 바로 앞 작은 책상에 앉았다. 나는 배우가 아니었다. 연극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의 음성해설 작가였다.
공연이 시작되자 음악과 조명이 무대로 흘러나왔다. 나는 무대를 바라보며 시각장애 관객에게 필요한 장면을 목소리로 전했다. 개방형으로 진행된 공연이었기에, 내 목소리는 무대와 객석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배우들이 술잔을 들어 건배하는 장면에서는 작은 사건도 생겼다. 배우들이 공연 전 나와 한 약속을 깜빡 잊고 늘 연습했던 대로 건배 없이 술을 마시려다가 내 해설을 듣고 황급히 잔을 부딪쳤다.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공연장에는 내 목소리와 배우들의 움직임, 관객의 반응이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 음악이 흐르자 배우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으며 외쳤다.
“음성해설, 서수연!”
나는 무대에 올라 배우들과 손을 잡고 관객에게 인사했다. 오랫동안 책상에 머물러 글만 쓰던 작가가 작품을 만든 사람들과 함께 박수를 받았다. 20여 년을 일했지만 처음 겪는 순간이었다. 늘 작품 뒤에 숨어있던 음성해설이 작품을 감싸는 하나의 목소리가 되어 객석에 닿은 것이다.


2002년, 나는 성우와 드라마 작가를 꿈꾸며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신문과 소설을 낭독했다. 어느 날 복지관의 한 직원이 새로 시작하는 ‘화면해설’ 사업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쓴 글을 내 목소리로 읽는 일과 시각장애인의 드라마 감상을 돕는 일이 신기하게 하나가 되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었던 일들이 원처럼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듬해 KBS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음성해설 대본을 쓰고 직접 낭독했다.
나는 지금 ‘화면해설’보다 ‘음성해설’이라는 말을 쓴다. 음성해설은 화면만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이고 화면이 없는 연극과 무용, 미술관의 작품과 공간까지 시각정보를 음성언어로 옮긴다. 국제적으로는 이를 ‘오디오 디스크립션(Audio Description)’이라고 부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한국에서는 음성해설을 번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부터 현장에서 시청각 정보를 음성언어로 옮기는 번역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 장면이 문장이 되고, 다시 목소리가 되어 누군가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과정이 신기했다.
2010년, 음성해설이 해외에서는 시청각 번역의 한 분야로 연구된다는 사실을 알고, 번역학을 공부하려고 했다. 국내에는 음성해설을 번역학으로 배울 과정이 없었기에, 나는 현장에서 품은 질문을 들고 영국의 대학원으로 갔다. 박사과정에서는 연극 음성해설 가이드라인을 연구했고, 지금은 현장과 연구에서 얻은 지식을 학생들과 나누고 있다. 개인의 경험에 머물던 현장 지식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도 접근성을 오래 이어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는』을 쓰며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을 세어 보니 약 7,800편이었다. 들으면 누구나 놀랄만한 숫자다. 그만큼 나는 오래 앉아 내가 해설해야 할 것을 보고 또 보며 분석하고 글을 썼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시간 속에는 더 많은 사람을 헤아리는 시간이 들어 있었다. 같은 드라마를 보고 싶었던 사람, 공연장에서 함께 웃고 싶었던 사람, 전시를 본 뒤 자기 감상을 말하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긴 시간을 지나며 나는 음성해설이 한 사람이 사회의 이야기에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드는 일임을 알았다.
그 사실을 처음 또렷하게 알려 준 사람은 시각장애인 임덕윤 영화감독이었다. 시력을 잃기 전 영화 촬영 현장에서 일했던 그는 감독의 꿈도 함께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음성해설을 쓴 <CSI 마이애미>를 들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는 해설을 들으면 머릿속에 영상이 펼쳐진다며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음성해설을 듣다가 나도 다시 영화를 촬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갔다. 모형 인형을 손으로 움직이며 배우의 동선을 짜고, 머릿속 장면을 촬영 감독에게 말로 전했다. 그렇게 완성한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는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나는 그때 알았다. 문화에 접근할 통로 생기면 누군가 포기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고, 그 사람이 만든 이야기가 또 다른 관객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새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사람들은 다음 날부터 줄거리와 배우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의 명장면은 SNS에서 유명해지고, 사람들은 유행어를 주고받는다. 이것은 사소한 오락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관계를 맺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음성해설이 없다면 시각장애인은 같은 시간에 같은 콘텐츠를 접하고도 그 대화에서 밀려난다. 비장애인이 관심이 없어서 안 보는 것과 볼 수 없어서 못 보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다. 장애인의 문화접근성이 필요한 이유는 거창한 곳에만 있지 않다. 누구나 이야기를 즐기고, 자기 감상을 말하고, 때로는 그 경험을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 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문장으로 번역하는 일은 어렵다. 한국어 사용자가 한국어로 문장을 쓰는데 무엇이 어렵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음성해설은 영상을 보이는 대로 옮겨 적는 일이 아니다. 빠르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쉽게 전달하려면 문장을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동시에 이 문장들이 화면과 일치해야 한다.
나는 먼저 작품 전체를 보고 원작 대본과 관련 자료를 살핀다. 화면을 반복해서 보며 등장인물과 장소, 소품을 확인하고, 대사와 음악, 효과음 사이에서 해설이 들어갈 자리를 찾는다. 화면에 나온다고 아무 소품이나 설명할 수는 없고, 특징 없는 소품이나 인물이라도 이야기에 필요하다면 해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