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시 챗GPT나 제미나이에 고민을 털어놓은 경험이 있으신가요? 새벽에 잠 못 이루면서 친구한테 하기 애매한 얘기들을 AI한테 먼저 꺼내는 거요. 저도 종종 AI 찬스를 이용합니다. 판단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언제든 들어주니까요. 근데 그 대화창을 닫고 나면 뭔가 허전한 느낌, 한 번쯤 느껴보셨나요? AI가 완벽하게 답해줬는데도 뭔가 해결된 것 같지 않은 그 감각이요.
오늘 만나 볼 한승우 대표님은 그 허전함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가상 세계에서 관계를 맺고 위로를 받아온 당사자이기도 하고, 그 세계 안에서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을 매일 만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거든요. 가상관계중독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대학생이자 스무 살, 그리고 누리안심다리 대표인 한승우 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누리안심다리의 대표를 하고 있는 한승우입니다. 누리안심다리는 ‘청소년은 청소년이 안다’라는 슬로건을 기반으로, 가상관계중독에 빠진 청소년을 보호하고 전문 기관과 연계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비영리 스타트업입니다. 어른의 시점에서 운영되는 기존 청소년 기관들과 달리, 청소년 당사자의 시선으로 가상 환경 속 사회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게 저희의 특징이고요. 요즘 많은 청소년들이 하고 있는 디스코드라는 SNS 안에서 편지형 고민 상담과 가상관계중독의 위험함을 알리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상관계중독을 겪은 당사자예요. 온라인이 현실보다 편했고, 그러다 보니 현실의 친구 관계나 일상보다 온라인에서 받는 인정과 소통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됐어요. 그렇게 깊이 빠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진로도 프로그래머를 꿈꾸게 됐고요. 지금은 소프트웨어·AI계열을 전공하면서 단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 온라인 의존도가 높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문제점을 깨달으셨고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디스코드 활동에 푹 빠져 있었어요. 디스코드에서 만난 지인과 얘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활동하는 이 온라인 청소년 생태계가 건강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 사회는 알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죠. 그런데 이 대화를 한 이후에 도무지 잠이 안 오더라고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활동이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비영리 단체를 만들 수 있는지 찾아봤어요. 다음 날 바로 지인에게 단체를 세우자고 제안했죠. 당시 저희 둘 다 미성년자였는데 장난스러웠던 그날의 대화가 꼬리를 물어서 누리안심다리가 시작됐어요.
그런데 제안만 했지 바로 확신이 생긴 건 아니었어요. 이 문제를 우리 둘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었거든요. 정량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생각했죠. 구글폼으로 설문조사를 만들어 제가 활동하고 있는 디스코드 커뮤니티에 뿌렸고, 무려 390명이나 응답해 줬어요. 응답자 중 59.9%가 최근 우울감을 경험했다고 했는데, 교육부 발표 청소년의 우울감 경험률이 27.7%니까 두 배가 넘는 수치였죠. 이른바 N번방과 같은 사이버 성범죄를 목격하거나 경험한 적 있느냐는 질문에는 절반이 그렇다고 응답했고요. 그때 확신이 생겼어요. “아, 우리만 느끼는 게 아니구나” 싶었죠.

| 디스코드를 주요 활동 무대로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그리고 '가상관계중독'이라는 개념도 아직 낯선데, 어떤 문제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디스코드는 슬랙과 네이버 카페를 합쳐놓은 구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누구나 직접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고, 채팅과 음성 통화도 사용할 수 있어요. 보통 게임할 때 음성 통화를 할 수 있는 SNS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로는 청소년들끼리 모여 형성된 커뮤니티가 다양하게 있어요. 그리고 그 커뮤니티 간 서로의 영향력을 다투는 문화도 있고요. 어른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청소년들만의 세계가 거기 그대로 있었던 거예요.

가상관계중독은 이런 SNS 생태계 안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현실의 대인관계와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말해요. 다만 한 꺼풀 걷어내고 들어가 보면, 학교 폭력이나 가정 내 갈등 같은 현실의 어려움을 피해 온라인으로 도피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서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사이버 범죄에도 쉽게 노출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저희 설문에서 성폭력 사례가 100건 가까이 나왔어요. 하지만 저는 사이버 인간관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저도 온라인에서 정서적 안정을 얻은 경험이 많았거든요. 현실과 온라인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온라인으로 고립되는 게 진짜 문제예요.
| 온라인에서 직접 가상관계중독을 목격하셨는데요. 기존 청소년 지원기관에서 해당 문제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고 느낀 지점이 있을까요?
이건 제 경험에서 나온 건데요. 제가 가상관계중독을 겪으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찾기가 정말 어려웠어요. 청소년 1388처럼 좋은 사업을 하는 기관도 있다는 걸 누리안심다리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그렇지만 청소년이 먼저 찾아오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청소년들이 활동하던 온라인 생태계 내부에서는 그런 도움이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저희는 기존 기관들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청소년들끼리만 공유하고 있는 이 안에서 도움의 손길이 닿을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름도 누리안심다리라고 지었고요.

| ‘청소년은 청소년이 안다’라는 슬로건이 재미있었어요. 청소년이 주도하는 방식이 성인 중심 조직과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던가요? 누리안심다리의 솔루션도 함께 소개해 주세요.
단체를 세울 때 후기 청소년이었던 지인과 초기 청소년인 제가 만나 “우리는 청소년에 대해서는 전문가다”라는 생각으로 슬로건을 짓게 됐어요. 그런데 청소년 기반의 조직은 단점이 많았어요. 다들 사회 초년생이라 비영리 생태계 경험도 없고, 사업 계획서 쓰는 법조차 몰랐거든요. 청소년이 임의단체를 만들려고 하니 통장을 만드는 데만 두 시간이 걸렸어요. 처음 세금 신고를 하고 원친징수를 했을 때의 당황스러움도 기억에 남아요. 그런데 장점도 있었어요. 저희의 주 활동 영역이 SNS니까 그 생태계에 진입하고 이용자들과 네트워킹을 해 나가는 건 정말 막힘없었어요.
저희는 ‘연결’이라는 키워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두 가지 솔루션이 있는데, 세이프노트라는 뉴스레터 사업과 고민편지 사업이에요. 둘 다 디스코드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어요. 세이프노트는 사회 안전망처럼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가상관계 생태계까지 끌어오는 사업이고, 고민편지는 상담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서 청소년들이 상위 기관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돕는 게 목적이에요.
| 세이프노트는 뉴스레터 형식을 택했는데, 상담이나 캠페인 같은 더 직접적인 방식 대신 뉴스레터를 선택한 데는 어떤 전략적인 판단이 있었나요?
매우 현실적인 이유였어요. 설립 자금이 없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인프라가 필요하지 않으면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어요. 비영리 단체에는 보통 다 뉴스레터가 있잖아요. 저희는 그걸 외부로의 홍보가 아니라 유저들이 볼 수 있는 SNS 내부에 하는 방식을 선택했어요. 청소년 활동가분들이 블로그 글쓰기처럼 간단하게 참여할 수 있는 형식이기도 했고요.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가 온라인에서 활동을 하고 있으니, 단체가 조용하면 망할 것처럼 보여요(웃음). 그래서 매주 뉴스레터를 발행하는 게 일종의 생존 신고 역할도 해요. 세이프노트가 먼저 만들어졌고, 8월부터 고민편지 사업이 시작됐어요. 그 후로는 세이프노트가 고민편지로 유도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요. 글을 읽다가 마지막에 “누리안심다리 봇한테 안녕이라고 보내보세요”라는 문구로 편지를 쓰게 되는 식이에요. 작년 25편 중에서는 ‘멀리 있어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글이 가장 반응이 좋았는데, 가상관계 중독 청소년들이 온라인 연애를 많이 하다 보니 자기 이야기처럼 읽혔던 것 같아요.

| 온라인을 통한 편지형 고민상담 '고민편지'도 인상적이었어요. 접수된 157건의 편지 중 58%가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는데, 이 기준은 어떻게 만드셨나요? 그 수치를 처음 마주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아, 너무 많다”라고 생각했어요. 탄식도 좀 나왔고요. 처음 상담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사실 조금 만만하게 봤거든요. 학업 스트레스, 친구 갈등 정도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열자마자 자살과 자해 얘기가 들어왔어요. 그때 이런 고민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싶은 당황함에 사업을 한번 재정비했어요. 전문 상담사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상담사를 모셨어요. 지금은 저와 코파운더 2명, 전문 상담사 9명, 청소년 활동가 15명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청소년 활동가들은 또래 상담사 느낌으로 일반적인 고민에 답장을 쓰고, 전문 상담사분들은 더 무거운 이야기들을 맡아주세요.

고위험군 분류는 AI를 활용하고 있어요. 편지에 자해, 자살, 학교폭력 등의 단어가 포함되면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데, 핵심 기준은 ‘청소년 활동가가 답장을 써도 되는가’ 예요. 가상관계중독 청소년도 위험한 상황이지만 청소년 활동가도 편지를 통해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기준을 꼭 지키려고 해요. 너무 민감한 주제는 전문 상담사분들에게 연결하고요. AI는 분류를 제안할 뿐이고, 최종 결정은 항상 담당자가 하도록 해요.
그리고 안전한 상담을 위해 상담윤리 관련 OT를 진행합니다. 모든 활동가들의 활동 결과물은 저와 코파운더의 검토를 받고 발행돼요. 이 과정에서 표현을 정제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은 자살을 미화할 수 있으니 쓰지 말자, 이런 식으로 고쳐 나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