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종종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젊은 환자가 중증 질환 진단을 받았을 때, 의료진이나 보호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리죠. "아직 젊은데...", "이제 시작인데..." 그 말속에는 은연중에 이런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젊음은 당연히 건강해야 한다는 것. 질병은 나이 든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 그래서 젊고 아픈 사람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존재가 됩니다. 마치 무대 위에 잘못 선 배우처럼요.
하지만 현실의 숫자는 다릅니다. 지난 30년간 전 세계 20~34세 암 발병률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한국도 비슷합니다. 20대 당뇨병 환자는 42%, 고혈압 환자는 26%나 증가했죠. 그런데도 '청년 일자리', '청년 주거', '청년 문화'를 이야기할 때 '아픈 청년'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력서 공백기에 "투병했습니다"라고 쓰면 "아픈데 왜 일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이 돌아오곤 합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뤄지는 일들. 이 모순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스튜디오어중간 대표 김가현입니다. 2-30대 젊은 투병인들의 서사를 여러 장르의 콘텐츠로 엮은 비정기간행물 ‘매거진 <병:맛>’을 제작하고 있어요. <병:맛>은 국내 최초 (아니 어쩌면 세계 최초) 2030세대 투병문화매거진입니다. 스튜디오어중간 편집부가 2020년 말 창간한 잡지이죠. 잠깐, 생각해 보니 <병:맛>을 소개하려면 스튜디오어중간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스튜디오어중간. 힙하고 핫한 회사명이 넘쳐나는 가운데 왜 하필 ‘어중간’이라는 이름일까요?
‘너 참 어중간하다’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스튜디오어중간을 창립한 장지수 작가(전 대표)는 30대 초반, 건강 상의 큰 위기를 겪은 ‘청년투병인’ 당사자입니다. 직장인 시절, 아침에 출근을 준비하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을 찾았고, 뱃속에 500원짜리 동전만 한 암덩어리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삶을 통째로 뒤흔든 질병과의 만남, 그리고 이어진 투병의 시간. 그 시간을 통과한 후, 이전과는 달라진 몸으로 사회에 복귀하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예전보다 신중한 태도로, 더 나은 선택이 있을지 고민하는 빈도가 잦아졌죠. 그때마다 되돌아온 건 “넌 왜 이렇게 어중간하냐”라는, 질문을 가장한 질책이었습니다.
'어중간' 사전적인 정의는 이렇습니다. ‘거의 중간쯤 되는 곳, 또는 그런 상태’ 단어의 뜻을 짚어보았을 때, 전혀 부정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어요. 오히려 분명한 방향과 태도를 가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런 여유롭고 긍정적인 이미지가 그려졌죠. 그래서 장지수 작가는 다짐합니다. 이제 나에게 남아있는 삶은 최대한 어중간한 태도로 살아야겠다. 그런 다부진 의지가 담긴 사명이 바로 ‘스튜디오어중간’입니다.
김가현 에디터(현 대표)는 살면서 이따금 병치레를 하긴 했지만, 삶을 뒤흔들 만한 중증질병의 경험은 없었습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시기에 장지수 작가를, 그리고 2-30대 ‘청년 투병’이라는 키워드를 만났어요. 사회적으로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에 예상치 못한 질병을 만나 투병하는 또래들의 경험이, 자신의 퇴사 후 공백기와 겹쳐 보였습니다. 청년투병인이 겪는 어려움이 ‘쉬었음’ 청년으로 사는 본인의 고립감, 소외감과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달았지요. 그렇게 ‘청년 투병’이라는 이슈를 문화로 풀어내는 매거진 <병:맛> 창간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매거진 <병:맛>의 기획의도를 전하기에는 이 문장이 충분할 것 같아요. <병:맛> 창간호인 Vol.1 ‘빨강’ 편에 수록된 에세이 <젊은 투병인에게 전하는 책과 문장들> 중 일부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말이라는 건 언제나 맥락적이지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겐 더욱 그렇다. 똑같은 말이 비수가 되기도 하고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불행에 압도되어 있는 아픈 사람은 애초에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니다. 이 고통을 누가 안다고 해도 화가 나고(네가 뭘 알아) 모른다고 해도 화가 난다(이걸 어떻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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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덮으면 그만인 것이다. 의학적 처치 때문이든 주변 사람들 때문이든 병 자체 때문이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침입당하는 느낌에 시달리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소통에 목마른 투병인에게, 개인적으로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의 말을 듣거나 듣지 않길 선택할 수 있다는 독서의 조건은 아플 때 책을 오히려 가장 가깝고 편한 친구로 만든다. 당신은 이 글도 덮어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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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아프다는 건 젊기에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일이기도 하고 아프며 살 날이 많은 것 같아서 아득하기도 한 일이다. 질병의 충격과 영향 아래 오랫동안 살아갈 당신,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말을 만나길. 실낱같은 빛, 거의 무심해서 좋은 위안, 악몽으로 깬 이의 등을 쓸어내려주는 손, 다시 세상으로 끌어당기는 중력, 인간의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표시하는 작은 돌멩이들, 황무지를 찾아 헤맬 때 손에 든 나침반 같은, 그런 말들을 찾길, 아니 당신이 찾지 않아도 말들이 당신에게 올 테니, 그 말들을 소중히 쥐길, 그 말들에 붙잡히길.
- 젊은 투병인에게 전하는 책과 문장들 (메이, <병:맛> Vol.1 中)

고통의 한가운데 놓인 사람에게 말과 글이 무슨 소용일까요? 매거진 <병:맛>의 차별점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병:맛>은 청년투병인을 위로하려고 만든 책이 아닙니다. 젊은 투병인들을 무작정 불쌍하거나 안타까운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죠. 매거진 편집부는 오히려 섣부른 위로를 경계합니다. 그러한 태도로 콘텐츠의 만듦새를 가다듬고요. 매거진 <병:맛>은 단서를 제시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질병의 영향 아래 있는 2-30대 청년들이 투병의 시간이라는 망망대해를 건널 때 필요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그 이야기를 여러 장르의 예술적 결과물에 담아요. 이로써 이 말과 글과 이야기가 꼭 필요한 이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작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질병을 경험합니다. 나이가 어리거나 젊다고해서 비켜갈 수는 없지요. 청년들의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왔다는 사실은 꽤 이전부터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되었는데요. 건강보험공단 통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20대 당뇨병 환자는 42%, 고혈압 환자는 26%나 증가했습니다(2022년 기준).¹ 노인이 아닌데도 노인성질환을 겪는 젊은 환자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2-30대 암 발생률은 전세계적인 이슈입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 타임즈는 ‘주요 20개국(G20)의 20~34세 암 발병률은 30년 만에 최고 수준’²이라며 ‘다른 어떤 연령대보다 빠른 증가세를 기록’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정신건강은 또 어떤가요? 2-30대의 자살률과 고독사는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른지 오래입니다. 2022년 기준 우울 에피소드 및 재발성 우울증으로 진료를 받은 2030 환자 수는 100만 명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아픔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2030세대가 자신의 질병을 말하는 것은 어쩐지 눈치가 보이고, 여전히 당당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청년’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체력 좋고 건강할 것을 기대받는 존재입니다. 책『젊고 아픈 여자들』의 저자 미셸 렌트는 "젊음은 질병이나 장애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고, 젊음이라는 단어가 이미 건강을 포함한 것으로 통용되기에 ‘젊고 아픈 사람’은 존재 자체로 모순적"이라 말합니다. ‘건강한 청춘’ vs ‘아픈 노년’이라는 이분법적 시각 속에서 현재 투병 중이거나, 투병 이력을 가진 청년들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됩니다.

아프면서도 학업, 취업, 연애, 결혼 등 생애 과업을 이어가야 하는 청년 투병인. 2-30대 전반에 놓인 삶의 숙제 앞에서 ‘투병 이력’은 결함이 됩니다. 청년을 위한 각종 정부지원제도에서도 ‘아픈’ 청년은 배제됩니다. 고용복지센터 청년일자리 지원 제도에 따르면 ‘지병, 건강 쇠약 등으로 근로가 불가하다고 판단하는 자’는 청년임에도 지원대상이 아닙니다. 현장 실습으로 산업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뒤 부당해고 당한 청년이 ‘일학습병행제’로 공부하던 학교에서까지 본인 동의없이 ‘자퇴’ 처리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신체 또는 정신적인 장애로 일학습병행을 계속하기 곤란한 경우, 학습근로계약 해지 사유가 된다는 법령이 근거로 작용했어요. 이미 경력 형성을 시작한 청년에게는 투병으로 인한 공백기가 문제입니다. 이력서 상 공백기를 ‘아파서 쉬었다’고 말하면 아픈 사람이 왜 일하려고 하냐며 역질문이 따라옵니다. 담론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사각지대에 놓인 2-30대 청년투병인은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한 채 고립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학 2-3학년쯤 되면 진로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게 노력해 나가잖아요? 그런데 사실, 저는 (제 몸으로) 9 to 6 출근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늘 해왔어요. 그래서 방어막으로 ‘나는 대학원에 갈 거다’라고 친구들에게 말하고 다녔어요” (희우, 29세)
“저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위암 진단을 받았어요. 그래서 위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게 됐고요. 예전에 일했던 분야에 재취업을 준비해 본 적이 있는데요. 회사에서 식사를 어떻게 할지부터가 고민됐어요. 어느새 점심시간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무서운 단어로 변해 있더라고요” (장지수, 39세)
“치료 도중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그때 평생교육사 인터넷 학원을 등록해서 수업도 듣고 그러다가 ‘아, 이러다 더 큰 병 걸리겠다’ 싶어서 멈췄죠” (곽승희, 36세)
- 패널 Talk <2030 투병인의 먹고사는 일> (<병:맛> Vol.2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