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진로를 고민할 때 자신의 흥미와 적성, 성적을 살핍니다. 하지만 이주배경청소년에게는 '체류자격'이라는 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점수제'가 무엇인지, 선택할 수 있는 체류 경로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성인기를 맞이합니다. 진로 상담 과정에서 꿈을 묻고, 적성을 탐색하지만, 정작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적 조건은 다루지 않았던 것입니다.
써니스콜라(Sunny Scholar)로 모인 프로퍼(Proper.)팀은 이 간극을 발견했습니다. 써니스콜라는 사회문제 해결을 목표로 청년들이 직접 솔루션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사회혁신 프로그램으로, 프로퍼 팀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이주배경청소년의 진로설계 워크북 'immi(이미)'를 개발했습니다. 145곳의 기관을 두드리며 현장의 목소리를 모았고,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제도를 풀어냈습니다. 이 글은 체류자격이라는 제도적 장벽 앞에서 주저앉지 않고, 청소년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 선 immi의 이야기입니다.


팀 프로퍼는 대학생들이 해결 가능한 크기로 문제를 정의하여, 사회문제 해결에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Sunny Scholar 3기로 모인 팀입니다. 2024년에 모인 저희 팀은 프로젝트 초기 ‘다문화’라는 큰 틀 안에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문제를 찾기 위해 이주민센터에서 봉사활동을 진행하던 중, 5살 이안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저씨가 돈 없어서 유치원 오지 말라고 했어요”
월요일엔 유치원에 가냐는 질문에 이안이는 돈이 없어서 유치원에 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 다 국가에서 지원되지 않나?”
하지만 이안이는 외국 국적으로 지원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안이의 부모님은 난민신청자로 기타(G-1) 비자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해당 비자는 신청 후 6개월이 지나야 취업 활동이 가능해 현재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타(G-1) 비자에 대해 찾아보며 ‘체류자격’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체류자격은 외국인이 한국에서 체류 또는 거주하면서 행할 수 있는 사회적인 활동이나 신분의 종류를 말합니다. 한국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 어떤 활동에 제한이 있는지 모두 ‘체류자격’, 쉽게 말해 비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안이를 통해 부모의 체류자격이 부모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문제를 겪는 대상자를 찾는 과정에서 미등록 이주아동 또한 같은 문제를 겪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미등록 이주아동은 부모님의 체류자격이 만료되면, 자동으로 본인의 체류자격까지 만료되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등록 체류자가 되는 아이들입니다.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 아이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까 다양한 방면에서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꿈이 있어도 체류자격 때문에 이룰 수 없으니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체류자격이 안정되지 않으면 미래, 진로 설계가 어렵겠다고 생각해, 이주배경청소년의 진로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미등록 이주아동 당사자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았기에, 먼저 데스크 리서치를 바탕으로 문제, 원인, 피해 가설을 세우고 해당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미등록 이주아동을 지원하고 있거나 지도해 본 이해관계자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체류자격에 대한 고려 없이 성인이 되면 미등록 상태로 미끄러지기 쉬운 상황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주배경청소년의 진로 설계에 있어 체류자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연구를 진행하던 2024년까지만 해도 방문동거(F-1), 동반(F-3), 일반연수(D-4) 비자를 소지한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성인이 되면 비자가 만료되어 새로운 체류자격을 획득해야 했습니다. 당시 법무부의 체류 관리 제도상 취업 비자를 따려면 ‘학위’가 필수 요건이었기 때문에 이 학생들은 한국에서 계속 살기 위해 대학에 무조건 진학해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진로에 대학이 필요하지 않아도, 이주배경청소년들은 ‘체류자격’,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대학에 진학해야 했던 것입니다.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어떤 전공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한국에서 계속 살 수 있는지가 결정되었기에, 저희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가 존재한다면, 이주배경청소년의 진로 교육에는 반드시 체류자격이라는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프로퍼는 이주배경청소년의 진로·진학 지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총 145곳의 지원센터 및 학교에 컨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체류자격을 고려한 진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 기관은 단 3곳에 불과했습니다. 진로 교육은 대부분 체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제빵 체험을 제공하면서 실제로 이 학생들이 제빵사가 될 수 있는지(ex. 제빵사로 취업 비자를 받을 수 있는지)는 고려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요소가 고려되고 있지 않으니, 팀은 실체 없는 문제를 파고 있는 건지, 문제가 이론 상으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우연히 만난 문제 당사자와의 인터뷰가 문제와 솔루션에 확신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취업 비자의 구조적 문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무료로 비자 상담을 해주는 행정사 오픈채팅 카톡방에 이주배경학생들이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취업 가능한지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때 채팅방에 계시던 분께서 실제로 자신이 특성화고를 졸업 후 바로 취업하고자 했으나 학사 과정이 필요함을 알고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다고 하셨고, 연구 5개월 만에 처음으로 문제 당사자와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데스크 리서치로 세웠던 모든 가설을 성장 과정에서 정확히 경험했다는 문제 당사자의 말에 확신을 얻고 문제정의를 넘어 솔루션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프로퍼는 진로에 따라 한국 체류 여부가 결정되나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지 못한 이주배경청소년들에게 주목하여, 이들에게 체류자격을 고려한 진로 설계 솔루션을 제공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총 3차에 걸쳐 솔루션의 형태를 변경하고, 4차의 MVP 테스트를 진행하였습니다.

가장 처음 제작한 솔루션은 ‘체류자격 유형화 데이터베이스’였습니다. 방대한 비자 정보 중 청소년에게 꼭 필요한 내용만 정리하면 스스로 진로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점수제’, ‘단순노무’와 같은 용어가 이해하기 어렵고, 정보량이 많아 정작 본인에게 필요한 정보를 찾기 힘들다는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이에 두 번째 솔루션으로 체류 흐름을 시각적으로 쉽게 보여주고, 개인 비자 유형에 맞춘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개인 맞춤형 체류 흐름 결과지 제공 서비스’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MVP 테스트 결과 아직 진학이나 취업에서 체류자격 문제를 직접적으로 겪지 않은 청소년들은 이해관계자(교사·기관 실무자·부모 등)의 개입 없이 자발적으로 솔루션을 찾아 활용하기 어렵다는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학습할 수 있는 진로 설계 도구인, 체류자격 기반 진로 설계 워크북 ‘이미(immi)’를 최종 완성하였습니다.